Eremeth's 虛勢sism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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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 누이 연수영 비문 간단한 교차검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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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의 여동생 연개수영은 실존인물이다?

시간이 없어서 간단히 교차검증을 해보자면 645년 1차 고당전쟁 때 비사성의 함락과정과 고신감과의 전투과정이 보다 상세하며 고자 묘지명과 삼국사기에 나온 마미성이 항구 역할을 하는 듯 합니다. 1차 고당전쟁 때 당군의 규모를 정사에 적힌 것들 보다 상당히 많게 보고 있습니다.

당인은 唐奴, 당태종은 매괴왕이라고 하는 비칭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연개소문의 남동생 이름이 삼국사기 등에는 淨土로 나온 반면 비문에는 靜土라고 나와있더군요. 그리고 보장태왕의 연호를 開化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는 위서로 판명된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에 나온 보장태왕의 연호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만일 중공에서 보관하고 있다는 연수영 관련 비문들이 진짜라면 이유립이 환단고기를 만들 때 참조한 텍스트들 가운데 후기 고구려 고유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 사료가 있다는 것이겠지요. 그렇다고 이유립이 위의 비문들을 봤을 가능성은 없으며 다른 계통의 고구려 고유의 사료를 참고한 듯 싶습니다. 왜냐하면 환단고기에는 위와 같은 내용들이 일절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개화라는 연호가 일치한다고 해서 환단고기에서 개화가 나오는 대목들이 당대의 진실을 보장한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우선 환단고기에서 전하는 고당전쟁 관련 기록들이 중국 측 사료와 겹치거나 인용한 부분이 존재하고 위의 비문에서 고구려는 칭제하지 않았지만, 환단고거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에서는 칭제를 하고 있습니다.

이로 볼 때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는 이유립이든 이맥이든 누구든 간에 한참 후대에 편집하거나 지어낸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좀 더 극단적으로 이유립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보장태왕의 연호가 개화라는 것을 알게 되고 이를 환단고기를 만들 때 참조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며 이는 환단고기가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이기도 한 듯합니다.

*** 이유립이 죽기 전에 최소한 환단고기 만들 때 참조한 텍스트라도 공개했음 좋으련면만...;;
*** 발해 황후 묘지석 두 개와 더불어서 중공 쪽에 미공개 자료들이 더 있을 듯 한데, 공개 좀 했음 좋겠습니다. 캥기는 게 많아서일까요?ㅋㅋㅋㅋ

덧글

  • 마광팔 2010/09/07 13:12

    여기는 에레메스님의 블로그니 가급적 에레메스님의 의견에 따르는 방향으로 의견을 제시하겠는데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를 누가 지어낼 수 있겠습니까?
    즉 환단고기를 전부 이유립 선생이 지어낸다는 게 그게 상식적으로 가능하겠습니까?
    설령 편집, 수정 등이 있었어도 다 어디서 내려오는 기록에 근거를 두었다는 것입니다.
  • 한단고기의 문제가 바로 그런 출처불분명하다는게 문제라는거 아실텐데요?
    기본 어느 역사를 기반으로 하여 학자가 과장할수 있다는 사실적 근거는 바로 일본 역사학자들이 보여주었고 대표적인게 메이지유신이후에 재정립된 일본신화를 비롯하여 일본서기 문제라는거 다 알고 있는 사항들 아닙니까?
    미연시의REAL 2010/09/07 14:31

  • 설사 이유립 선생의 발언들을 신빙한다 해도 현존하는 환단고기는 진본이 아니라 그의 '기억력'에 의존해서 쓴 것에 불과합니다. 에레메스 2010/09/07 17:04

  • ========================================================================================================
    이 댓글은 광팔이, 너의 댓글이니 가급적 니 의견에 따르는 방향으로 의견을 제시하겠는데 일본서기 속일본기를 누가 지어낼 수 있겠음?
    즉 일본서기의 조작내용를 전부 오노 야스마로가 지어낸다는 게 그게 상식적으로 가능하나?
    설령 편집, 수정 등이 있었어도 다 어디서 내려오는 기록에 근거를 두었다는 것입니다.
    ========================================================================================================
    로 바뀌는 게 가능하네? 'ㅅ'
    海凡申九™ 2010/09/07 21:07

  • 비밀글 2010/09/07 14:06

    비공개 덧글입니다
  • 그 가능성은 염두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속단은 하지 않았지요. 그리고 황원갑 작가가 혼자 입수한 것이 아니라 사학자 전영미 박사와 전기복 역사 연구가로부터 연수영에 대한 자료 수집에 도움을 받았다고 합니다. 에레메스 2010/09/07 17:02

  • 비밀글 2010/09/07 17:35

    비공개 덧글입니다
  • 사실 저도 그게 의문이라서 단정을 못 하고 가정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두 사람에 대한 정보는 연수영 관련 내용 말고는 일절 찾을 수 없더군요. (어제는 국회도서관까지 뒤져봤었습니다.;;) 에레메스 2010/09/07 18:04

  • 한단인 2010/09/07 18:12

    저기 비문상에서 개화 연호가 보장왕 즉위 2년 전에 쓰였다는 게 묘하게 신경쓰이는 군요.

    지명에서 묘도열도 묘사한 것도 그렇고...
  • 보장왕 즉위 2년 전에 개화가 쓰였다니요? 무슨 말씀이신지...^^; 에레메스 2010/09/08 19:47

  • 번동아제 2010/09/07 20:00

    현재까지 공개된 정보만으로는 진짜일 가능성을 검토하는 것 조차 무리인 것 같습니다. 실제로 저 글에서 잡다하게 언급하는 내용 중에 실체가 확인되는 것은 서길수 박사가 본 "소장루 안내판" (비석이 아님) 밖에 없습니다. 연개소문은 경극에서 악역으로 자주 등장하기 때문인지 잡다한 전설이 많이 남아있고, 서길수 박사가 본 "안내판"도 그런 내용 중 하나였죠. 그래서 서길수 박사도 현대에 세운 안내판의 내용에 대해 "전설 이상의 가치를 가질 수 없다"고 일축한 것이구요.

    나머지 이른바 비공식적으로 입수했다는 일련의 비문 내용은 언제, 어디서 어떤 경로로 입수했는지에 대한 전거가 전혀 없습니다. 저 내용대로라면 7세기대 고당 전쟁 상황을 담은 고구려 측 금석문이 남아있다는 이야기인데... 학술논문에서 한번이라도 언급된 사례가 있다면 사진이나 탁본이 없더라도 검토해 보겠지만, 그런 사례조차 없는데 저 내용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사실 해당 글을 쓴 S님이 저 주제로 쓴 글을 살펴보면 시시 때때로 내용이 변해서 과연 저 분이 입수한 자료의 실체가 무엇인지도 무척이나 조심스럽습니다. 심지어 저 분은 어떤 글에서는 "서길수 박사가 연구한 비사성 비문"이라는 표현도 쓰더군요. 서길수 박사는 "소장루 안내판"밖에 거론한 적이 없고, 그나마 전설 이상의 가치를 가질수 없다고 이야기했는데, 그런 "서길수 박사가 연구한 비사성 비문"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기본적인 팩트조차 오락가락하는거 보면 현재로서는 실체가 없는 이야기로 보입니다.
  • 기본적인 팩트의 오류인지 아니면 서길수 교수님께서 공식적인 논문 같은 데서는 일부로 거론을 하지 않은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본문에 적은 비문의 내용과 유사한 글을 몇 년 전에 봤던 기억이납니다.

    우리 역사 게임을 만드는 모임의 제작진 중 한 분이 썼던 글인데, 당시 저는 연수영 등의 인물에 흥미가 있어서 어디서 그런 자세한 정보를 얻었는지 해당 글을 쓴 그 분께 여쭈었었습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그 분께서 서길수 교수님으로부터 얻었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 분명 네잇온 아이디 교환도 했었는데, 지금은 제 친구목록에 없네요. 확인차 다시 여쭤보려고 했는데...;;

    아무튼 저것이 진짜든 아니든 간에 순수하게 간단히 교차검증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듯 싶습니다.
    에레메스 2010/09/08 19:46

  • 비밀글 2010/09/08 02:00

    비공개 덧글입니다
  • 이번에 다시 관련 논문과 책들 살펴봤었는데, 서길수 교수님께서는 분명 논문이나 책자 같은 데서는 전설이상의 가치를 부여하지 않고 계시더군요.

    전영미 박사에 대해서 찾아봤었지만, 박물관 유물해설하는 분 말고는 역사쪽과 관련 된 분은 아직까지 찾지 못 했습니다. 박물과 유물해설하시는 분도 자원봉사자로 사학계 쪽 분은 아니신 듯 하고요.

    아무튼 저는 가능성을 열어두렵니다. 일부 내용만 봤을 때 정사와도 어긋나지도 않고... 뭐, 진짜 위작이면 어쩔 수 없지만요.^^;
    에레메스 2010/09/08 19:59

  • 비밀글 2010/09/08 18:36

    비공개 덧글입니다
  • 아... 죄송합니다.ㅠㅠㅠㅠ

    제가 주의를 못 했네요.^^;
    에레메스 2010/09/08 20:00

  • 호랑이 2010/09/09 20:06

    보통의 사학관계자들이 비공식적으로 입수했다는 것은... 대부분 해당지역 관공서에 있는 지역유래 안내장, 향토지, 안내판, 민간야담으로 쓰여진 글들(조선시대에도 민감야담이나 지역을 소개하는 잡서들이 꽤나 많이 있었죠.)에서 추출해오는 것이므로 기존의 공신력있는 정사와 대비되어 문제가 많을 경우에는 검증요구가 들어올 것이 자명하므로 싣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지요. 고구려, 발해사의 유적이나 유물들은 중국측에서 뭐가 캥기는지 공개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으로 많은 경향이 있습니다.

    아마도 자신들의 역사정리사업에 불리한 면이 있어서 그런면도 있겠지만..
    연수영과 고구려 해양유적에 관한 문제가 역사적 사실성과 진실성이란 측면에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진실이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확증적인 자료는 없습니다. 일본, 중국, 한국의 어느 기록사서에서도 연수영이란 이름자가 나온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전설, 설화, 혹은 지역유래 안내장, 향토지, 안내판, 민간야담서 및 지역잡서들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일 따름이지요.

    즉, 원본이 공개되지 않는한은 가뜩이나 기록사서에도 나오지 않는 연수영이라는 사람의 실존성자체를 증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문제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불과 7년정도입니다.

    중국에서 전설상 연개수영(혹은 연개소정 - 연수영)이 지키던 요새관문인 청석관을 세계문화유산에 등록하였고, 순차적으로 관련된 유물(이쪽에서 전설, 설화가 많은 편입니다.)이 세계문화유산(유네스코)에 중국의 유적지 - 유산으로 등록되면서 촉발된 현실적 역사전쟁이 되어버린 상황인 셈이지요.

    면밀하게 보면, 중국의 입장에선 원본을 공개하지 않고 한국내부의 분열 내지는 확증불가상태를 유도함으로서 순차적으로 중국의 유적지 - 유산으로 묶어버리는 동북공정이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전략전술임에는 누구든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대응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 호랑이 2010/09/09 20:15

    2003년 이후로 고구려의 해양유적지를 중국의 유적지-유산으로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에 등재-관리하고 있습니다. 이로 볼때, 연수영이란 인물이 '실존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추정'에는 도달합니다. 문제는 어디까지나 '추정'일 뿐, '확증'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중국의 동북공정이 지나친 역사적 진실의 왜곡이라는 국제여론의 비난과 비판을 아주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일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무언가 구색을 맞춰 구실을 가지려면.

    그러한 문제를 제기할 상대국가에서 확증하기 힘든 부분을 들춰, 그러니까 우리의 유적지 - 유산이다라고 어필할 수 있는 부분도 존재합니다. 연수영이란 인물이 '삼국시대 여성들은 대단해'라는 책이라든지, 윤명철 교수의 고구려 해양사 서적이라든지, 서길수 교수의 논문에서 부분적인 언급이 되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역사적 사실로서 객관적으로 확증된 토대에서 이뤄졌다기보다는...

    2003년 이후, 옛 고구려의 해상유적지나 관문(문제가 되는건 연수영의 전설이나 설화가 많이 떠도는 지역이라는 점)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관리되면서 언론에서도 나옵니다.(세계일보 등의 신문에서도 그와같은 내용들이 나올 정도로, 한-중역사전쟁의 이슈 한가운데로 몰려나오는 상황에서 역사적 사료의 확증성이 미흡함에도 불구하고도 나와버린 상황이 된 것입니다.)

    저도 황원갑 작가님의 연수영소설 쓰는데 어느 정도의 조언을 해주긴 했습니다만, 구체적인 확증적 사료를 본적은 없습니다. 그런 것이 있었다면, 지금 이런 상황에선 더 많은 책과 논문들이 무더기로 쏟아질 것입니다. 한마디로 중국 너네가 뭔데 우리나라 위인을 중국의 인물로 둔갑해서 아예 그 유적과 유물까지 통째로 삼키려고 해 하면서 말이죠.
  • 호랑이 2010/09/09 20:25

    그러나 그러기엔 우리나라에서 확보하고 있는 확증적 사료는 없습니다. 전부 공신력이 취약한 안내판, 안내장, 향토지, 지역관보, 언론에 나온 신문기사, 민간야담 등이라는 비공식적인 통로에서 온 것이라 그에 따르는 확실한 비석문의 원본. 혹은 관련된 유물의 원본이란 결정적인 자료입수 없이는 확증할 순 없는 것이죠. 결과적으로는 구체적인 확증적 사료가 없는 가운데서 '교차검증'이라는 것도 무리한 면이 많습니다. 저기있는 내용들이 구체적으로 비석문 원본이나 유물의 원본이란 확실한 근거나 보장은 없는... 중국측에서 이래저래 거르고 걸러 세운 안내판, 안내장, 향토지, 지역관보, 언론신문기사, 오래전부터 내려온 설화, 민간야담잡서 등이라 이걸 갖고, 기존의 공신력이 강력한 정사와 대조한다는 것은 심히 무리수가 아닐수 없지요.

    문제의 핵심에는 사료의 확증성이나, 교차검증에 있지 않습니다. 고구려의 옛 해상유적지, 그것도 연수영이란 사람의 전설과 설화가 하필이면 가장 많이 나타나고 있는 지역에 있는 고구려 유적 - 유물들이 속속들이 중국의 유산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고, 관리되어 연구되어진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점이 심각하다는 사실입니다. 문제의 핵심에는 바로 이 키워드가 있다는 것이죠. 시간이 흐르면, 전설과 설화 등을 토대로 한 혹은 중국측에서 원본의 일부를 일정수준 조작된 자료들을 계속해서 안내장, 안내현판, 무슨 무슨 관보나 언론에 흘림으로서 띄워버리게 되어 13억 중국인들이 연수영이란 사람이 실존했고, 그런 사람이다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이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감으로서 쌓이고 쌓여 우리가 확증하지 못한다고 물고 뜯는 사이에, 그것을 인정해줄 사람은 우리가 아닌 전혀 다른 타국이나 3자들이 되어버리는 짱구가 될 것이라는 냉혹한 현실과 사실에 마주하고 있는 것이죠. 세계의 고고학회에선 신화나 전설, 설화도 하나의 역사적 자료로서 연구되고 있는 일종의 사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 호랑이 2010/09/09 20:35

    역사연구에 있어 사료의 범위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놓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교차검증 또한 그 범위가 결정될 것이라고 봅니다. 민간야사나 야담, 개인문집 등에 의한 야사, 신화, 전설, 설화도 일종의 사료나 역사연구의 가치가 있다고 보고 범위에 넣어서 해석할 것이냐. 아니면 기존의 공신력이 있는 확증적인 발굴유물과 유적을 토대로 역사서와 교차검증할 것인가에 따라서 그 범위와 결과가 상당히 다를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삼국사기, 삼국유사, 삼국사절요, 동사강목,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 책부원구, 일본서기, 일본고사기를 교차대조 백날 해봐야 연수영이란 인물은 아예 나오지도 않는 사람일 것이고.

    기존에 확증적으로 알려진 공신력이 가장 확실한 발굴유물과 발굴유적을 토대로 정사와 교차검증 해봐야 현실적으로는 추정조차도 어렵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나마 다수지역에서 동일인물에 대한 설화나 전설이 많은 것으로 보아 '추정'은 가능한 상태로 묶어놓는 것이지요. 저야 사학자도, 사학연구가도 아닙니다만. 제가 만약 그 관련자라서 논문내도 확실한 검증을 해줘야 하는 것이므로 당연히 그렇게 글 쓰겠죠. 철저한 증거주의에 입각할 경우에 말이지요.

    재판심리에서는 크게 철저한 증거주의와 객관적 정황주의를 근거로 심리하고, 판결을 내리는데. 철저한 증거주의에 입각해선 연수영이란 인물자체가 사실인지, 그냥 가공된 인물인지도 판단할 수 없는 판단불가능한 인물이고. 단지 객관적인 정황주의. 말하자면 다수 지역에서 동일인물에 대한 설화, 신화, 전설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고. 민간야사에 언급되어 있다는 점 등이 참작되면 실존성을 추정할 수 있는 인물이겠죠. 연수영이란 인물은 그와같은 정황적인 바탕에서 실존했을 가능성이 많은 인물이라는 것이지, 확증할 수 있는 철저하고도 확실한 증거는 중국측의 미공개 내지는 어떻게 조작되었는지도 알수도 없는 안내판, 안내장, 향토지, 지역관보, 언론에 나온 신문기사의 혼재로 알수 없다입니다.

  • 번동아제 2010/09/10 00:15

    제 짧은 생각에는 이 주제에서 연수영 전설이 얼마나 역사적 함의를 가지고 있느냐는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 같습니다. 저는 저 글에서 거론되는 일련의 금석문의 실체가 무엇보다 궁금하고,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저 글에서 내용을 인용하는 비문들은 단순히 전설들을 수집 정리한 내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단 신광서가 세웠다는 '청석관고비중수비'의 경우 비석을 세운 사람(신광서), 세운 연대(만주국 시절)가 나오고 장소까지 나오니 어느 정도는 실체 파악을 위한 단서가 존재하는 셈이죠. 하지만 S님이 쓰신 일련의 글을 보면 그밖에도 "석성 소장루에서 발견된 비문", "신광서가 확보했던 석성 점장대 비문", "신광서가 확보했던 오고성 비문", "전영미 충북대 교수가 연구한 비사성 발굴 비문" 혹은 "서길수 박사 연구한 비사성 발굴 비문"등 수많은 비문이 등장합니다.

    위에서 거론되는 비문 중 하나인 오고성 비문에서 인용한 내용 중 "我步騎"에서 我는 고구려를 지칭합니다. 상대방 군대를 이끄는 고신감을 "唐將"이라고 했는데 고구려는 국호를 적지 않고 "我"라고 했으니 자명하죠. 결국 저 글에서 거론하는 오고성비문이란 것이 진짜 실재한다면, 혹은 한때 실재했다면 중국 측에서 전설 내용을 기록해서 세운 비문이 아니라, 고구려 측 금석문이라는 이야기지요.

    결국 저는 저게 전설이니까 못믿는다는 것이 아니고, 실체가 불분명한 고구려 계통의 금석문을 사실상 전거로 내세우면서도 그 전거의 실체에 대해서는 "비공식적으로 입수한 자료"라고 표현하는 것에 대해, 불신을 표명한다는 뜻입니다. 단순한 석각이나 고분의 묵서를 제외하고 어느 정도 서사구조를 갖춘 내용을 갖춘 고구려 비석은 아직 2건 밖에 발견된 사례가 없는데 저 글에 나오는 일련의 비석들이 모두 실체가 있다면 고대사 연구에서 일종의 거대한 충격이겠죠. 그런 중요한 일련의 금석문을 전거로 제시하면서 입수 경위에 대해서는 너무도 간단하게 "비공식적으로 입수"라는 너무도 안이한 설명 방식으로 처리하는 것에 대한 불신입니다.

    예를들어 신광서가 옛 고구려 비석을 발견하고 그 구절 중 일부를 "청석관 고비 중수비"에 옮겨 적어놓았다거나, 아니면 사료적 가치는 아직 확실하지 않으나 청나라-민국시절 만주 모처에서 발간한 향토지에 고구려 비석 내용 중 일부를 옮겨 적은 내용이 있다거나...최소한 그 정도의 설명은 당연히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최소한의 설명조차 없이 "비공식적 입수"라는 아주 안이한 설명을 전제로, 일련의 비문 내용을 줄줄이 거론한다면 당연히 실체를 의심할 수 밖에 없죠.

    더구나 관련 글에서 "석성 소장루에서 발견된 비문"이라고 과거 인용한 한문 원문 중에 일부는 또다른 글에서 "석성 소장루 안내판의 내용"으로 바뀌기도하고, 충북대 전영미 교수 혹은 서길수 교수가 연구했다는 비문도 출간된 학술논문에서 실체가 확인되지 않는 것도 비문의 실체에 의문을 품게 만든다는 뜻이죠.이걸 단순히 전설을 사료적 근거로 삼을 수 있느냐의 문제로 치환하는 것은 저 글에 내재된 논리 전개 방식에 대해 적합한 비평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말씀하신 부분에는 동의합니다. 분명 황원갑 작가님의 호도는 성급한 면이 있습니다. 제가 이 글을 한 역사카페에도 올릴 때도 비공식적으로 입수한 비문의 일부가 어떤 경로로 입수되었는지 의문을 표한 적도 있고 하니... 그리고 황원갑작가님께 연구자료를 제공하셨다는 분들에 대해서도 궁금하기도 하고요.

    아래 호랑이님의 글을 읽어보니, 황원갑 작가님의 어떤 사실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오류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 그런데 S님은 정확히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
    에레메스 2010/09/10 20:21

  • 호랑이 2010/09/10 11:44

    문제의 핵심에 있어, 그 핵심을 어떤 것으로 보고 또 알고 싶어하느냐에 따라 해석은 천차만별이 될것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분명히 같은 문제인데, 그 문제를 바라보는 핵심이 달라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는 일들이 현실에서도 다반사니까요. 황원갑 작가님의 그 관련 소설에 있어 지인으로 일정한 조언을 해준 일이 있는 관계로, 번동아제님이 중시하는 핵심에서 접근하면.

    1. '비공식적으로 입수한 자료' - 이 부분은 쉽게 말해서, 학술적인 공신력이 인정될 수 있는 공식적인 채널을 통해 얻은 자료가 아니라는 뜻에서 다룬 것입니다. 저도 그렇게 조언을 하였고요. 왜냐하면, 확증적 사료논거를 확실하게 제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비공식적으로 입수한 자료에 속하는 것은 지역향토지, 언론기사, 안내판 등인데 그 내용이 '원래 있던 석각, 비문' . 즉 고구려나 혹은 그 후대국가인 발해에서 제작을 해놓았을 것으로 추정하더라도, 그 원본은 본적이 없고. 그 인용구를 안내판으로 향토지나 언론기사에 일부분 수록된 것을 긁어 모은 것이므로. 확증적 사료라고 보기가 힘들어 검증요구가 심하게 들어올 것 아닌가 하는 위험성을 제기한 적이 있었지요.

    2. 윤명철 교수의 저서나 서길수교수의 논문에는 '~전설이 있었다. 원래 있던 것은 사라지고' 라는 표현으로서 결국 전설로 밖에 볼 수 없는 것이지요.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단서가 있으되, 실체를 본적이 없으니까요. 황원갑 작가님도 그분들과 통화하고 했고, 관련된 내용을 안내판이나 향토지, 혹은 언론기사나 관보 등으로 들어는 봤다고 하지만 논문에는 확증적 실체만을 전거해야 하므로 현재로선 부정도 못하지만, 인정도 할 수 없다라는 답변을 해온 것으로 들었습니다.
  • 호랑이 2010/09/10 12:08

    3. 발견된 비문이라는 내용은 말하자면, 우선 서길수 교수님의 석성 소장루 안내판 인용구를 보더라도 '연개소문이 자기 누이 연개수영(盖秀英)을 위해 지은 것이라고 한다. 원래 있던 누각은 없어졌고 지금 있는 것은 원래대로 고친 것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원래 있던 누각이나 석각의 원본은 없어지거나 중국에서 관리되고 있는 것이고. 관련된 내용을 인용하여 세운 것이 지금 있는 것이라는 이야기인 것이죠. 다른 내용들의 비문에서 관련 향토지, 지역관보, 혹은 언론기사에서 나온 보도자료를 통해 인용구의 내용을 보면, '원래의 석각(금석문 - 비문)은 관리 및 통제되고 있다는 뉘앙스가 강하며, 지금 세워지거나 현재 있는 인용구들은 그것을 통해서 인용되어진 것이다.'라는 것인데 그 부분에 대한 설명에 있어 전달상 심각한 오류가 생긴 것으로 봅니다.

    4. 비사성 발굴석각(비문), 오고성 발굴석각(비문), 석성 발굴석각(비문)은 우리나라 학계의 학자들이 직접 가서 고고학적인 발굴을 한 것이 아니고, 서길수 교수의 안내현판을 인용한 구의 내용에서처럼, '이때 여기서 이게 나왔는데, 이것을 원래대로 고쳐봤다.'라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라 정확하게 그 관련 비문이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신광서의 일에서도 보듯이 단서는 분명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죠. 말하자면, 요령성 대련시의 요양관보에 나온 인용구를 보면, '이때 고구려 시기로 추정되는(1960년대) 석각이 있었는데 파손이 심해 전해지는 ~와 같은 내용만 실었다.'라는 것이죠.

    5. 즉, 국내에는 어떤 형태로든 관련 원본을 발췌한 사학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위에서 소개된 형태의 인용구인 셈이죠. 다만, 단서로서의 추측이 가능할 뿐인 것이죠. 전달상에 있어 국내의 학자들 가운데 실질적인 발굴, 탐사를 한 경우는 없습니다만. 이런 것을 전하는 과정에서 논리적으로나 전달상에 큰 오류가 난 것으로 보입니다. 비공식적인 원본발췌방법은 관련된 원본이 보관된 어떤 장소로 잠입하여 카메라로 찍든지, 동영상 찍어 몰래와서 공개하는 것도 일종의 비공식적인 방법이다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고.. 역시 조작되었을수도 있단 음모론도 생길 수 있으므로 공식적으로 한중사학자들이 원본을 놓고 제대로 연구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6. 소설이라는 것은 역사적 사실성을 전달하면서, 작가의 창작영역도 있습니다. 최근 나오는 사극, 역사소설의 왜곡논란은 본시 끊이지 않는 단골메뉴가 되었으니까요. 처음 이 소설을 쓰는 작가분께 확증적인 사료없이 쓰는 것은 위험한 것 아닌가하는 조언도 했었습니다.

    7.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가지를 긁다보니 거기서 오류가 생겼고, 인터넷이나 기타 검증되지 못한 창구에서 나도는 이야기도 확인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생긴 것으로 개인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8. 개인적인 사견으로 마지막 이야기를 놓고보면, 논점에 있어 역사적 함의가 중요할 때가 있고, 사료의 신뢰성이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연수영 문제에 있어 사료의 신뢰성 만으로 접근하여 중국의 해양공정에 찍소리라도 하려면, 한계가 너무 많다는 것이죠. 말하자면, 현실적으론 중국에 귀속된 영토지역에 중국은 자국 영토에 대한 역사연고권 정통성 확립차원에서 작업하는 것이므로 그러한 정치적 이해관계의 역사적 함의에 입각한 작업이므로. 찍소리도 할 수 없는 것이죠. 그냥 전부 중국 유산이 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사료의 신뢰성 측면에선 나은 것이고.

    9. 우리나라의 역사적 정통성과 명맥, 그리고 역사적 함의와 후일 그 영토에 대한 우리의 연고권의 정당성차원에선 좀더 융통성있고, 유연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 사견입니다.
  • 호랑이 2010/09/10 12:22

    마지막으로 어떤 역사적 연고권 내지는 정통성확립이란 정치적 이해관계와 맞물리는 사안에선 사료의 신뢰성이 많이 떨어집니다. 정사라고 명명되는 공식적이고도, 공신력있는 사서임에도 불구하고도 말이지요. 프랑스의 잔다르크도 그러한 정치적목적에 의해 역사적 사실성보다 더 부각된 측면이 있습니다. 연수영의 경우에는 정치적 목적에 의해 역사적 사실성보다 더 부각된 것인지, 아니면 역사적 사실성을 정치적 목적에 의해 활용되고 있는 것인지는 아직까지 이렇다 결론을 내리기 힘들 것 같습니다. 사료자체의 신뢰성보다 어떤 경우에는 정치적인 목적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거짓과 술수가 난무하는 부분도 역사속에서 충분히 있어온 일이니까요.

    예컨데, 사료가 풍부한 조선시대를 보더라도 이런 문제는 숱하게 나타납니다. 선조가 원균을 선무1등공신으로 책봉하면서, 말로는 이러이러한 공이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실체가 확인된 것은 제대로 없기에 신하들의 반발을 크게 삽니다. 선조 자신의 왕권확립과 보위차원이란 정치적 목적에서 출발한 논공행상이니 그것의 공정성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로 인해 역사적 사실성으로 보자면야 하등 가치도 없는 원균맹장론이 그러한 정치적 이해관계나 음모론에 의해 아직까지도 떡밥이 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 내용은 순수 사견이므로, 위에 열거한 것과 달리, 구체적으로 연수영 문제와는 직접적인 연관이나 관련은 없습니다.

    역사논쟁에 있어 '역사적 사실성'을 중시하는 분이 있고, '주변에 깔린 정치적 이해관계나 음모론'을 더 중시하는 분이 있으며, '역사적 함의나 자국의 정통성, 자존'을 더 중시하는 분이 있습니다. 저는 그러한 분들의 시각을 모두 존중합니다. 제가 역사에 전문적인 지식이 많은 것도 아니고, 탁월한 권위자도 아닙니다만... 숱한 역사관련 카페에서 활동해보면 충돌되는 3가지의 핵심에 그것이 있었다죠.

    좋은 토론의 장이 되길 바랍니다.

  • 그런 비화가 있었군요. 말씀 감사합니다. 황원갑 작가님의 호도는 마음으로는 이해하지만, 확실한 논증을 요구하는 논문에는 실을 수 없었겠지요. "실체"가 되는 원본이 공개되지 않았으니까요. (개인적으로 중국 측의 조작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다음카페 역사문(http://cafe.daum.net/alhc)에 호랑이님께서 쓰신 글들 퍼갈 수 있을까요? 연수영 관련 비문의 존재에 궁금해하시는 분들도 계시거든요.^^ 괜찮으시다면 호랑이님 본인께서 올리신다면 더욱 좋겠지만...^^;
    에레메스 2010/09/10 20:50

  • 한단인 2010/09/10 22:00

    본문 중에

    [- 개화(開化) 12년 신해 8월 ...중략... 개화는 보장왕의 연호로 보이는데, 보장왕 12년은 653년으로 계축년이고, 신해년은 651년이다.]

    라고 되어 있더군요.
  • 그러고 보니 2년의 차이가 있군요. 미쳐 보지 못한 부분인데...^^;;

    본문에 나온 다른 비문에는 개화 7년에 고신감이 이끄는 당군이 쳐들어온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삼국사기 보장왕조 7년조의 내용과 거의 비슷합니다.

    보장태왕의 즉위를 1년도 아니고 2년 씩이나 당겨서 볼만한 당위성이 없다면 진위여부를 떠나서 신해는 계축의 오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에레메스 2010/09/10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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