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5년 1차 고당전쟁시 당군의 규모가 10만 혹은 17만이라는 견해에 대한 비판 한국 고대사

  645년 1차 고당전쟁시 당군의 규모가 10만 명 혹은 17만 명이라는 견해가 아직도 널리 통용되고 있다. 10만 명이라는 견해는 644년 태종이 이적을 대총관으로 하는 요도도행군 6만 명, 장량을 대총관으로 하는 평양도행군 4만 명을 편성했다는 기록에서 기인한다. 그런데 이 견해는 태종의 친정군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심각한 문제가 있기 때문에 재론의 가치가 없다고 하겠다.

  다음은 당군의 규모가 17만 명이라는 견해에 대해 살펴보자. 이 견해는 신당서의 처음 출발할 때 육군이 10만 명, 수군이 7만 명이라는 기록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 견해는 이적의 요동도행군 6만 명, 장량의 평양도행군 4만 명 그리고 태종의 친정군을 7만 명으로 간주하여 당군의 전체 병력을 17만 명으로 파악하고 있다. 만일 이 견해처럼 태종의 친정군이 7만 명이라면 친정군은 육군 4만 명에 수군 3만 명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기실 현존하는 사료상 태종의 친정군에 수군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으며, 오히려 태종의 행로는 낙양-정주-유주-요택-요수-요동성으로 시종 육로이다. 이 같은 난점 때문에 태종의 친정군을 수륙 7만 명으로 보는 견해에서는 친정군의 일부는 대운하 등 강줄기를 따라 수로로 친정군에 합류한 것으로 파악하여 수군이 존재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 견해 역시 심각한 문제를 지니고 있다.

  우선 신당서의 기록상 수군 7만 명은 대운하나 강이 아닌 바다에서 활동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신당서의 처음 떠날 때 육군 10만 명, 수군 7만 명이라는 기록의 원본으로 추정되는 당회요에 의하면 처음 떠날 때 육군 10만 명, 장량의 수군 7만 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장량이 이끈 수군이 7만 명이라고 분명히 기재되어 있는 것이다. 이 기록은 추가된 수군 3만 명이 태종이 이끈 수군이 아니라는 것은 물론 장량이 이끄는 평양도행군이 처음 편성된 4만 명에 3만 명이 추가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신당서를 당회요와 함께 검토해보면 수군 7만 명은 온전히 장량이 이끄는 평양도행군의 병력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기존의 평양도행군 4만 명 편성시 언급되지 않았던 압록수에서 요병한 평양도행군총관 구효충, 고신감 등의 존재는 평양도행군이 4만 명에서 7만 명으로 늘었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전술했다시피 당군의 전체 규모를 17만 명으로 파악한 견해에서는 친정군의 규모를 7만 명으로 파악한 후 이 중 4만 명을 육군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앞서 검토했듯이 신당서의 수군 7만 명은 평양도행군의 병력이다. 이를 감안하고 여전히 17만 명이 친정군을 포함한 당군의 전체규모라는 것을 전제한다면 평양도행군 7만 명에 요동도행군 6만 명으로 친정군의 병력은 4만 명으로 볼 수 있다. 과연 그럴까?

  책부원구에 의하면 태종은 요수를 건너 후 이적의 요동도행군과 합류하기 8일 전에 갑사 6만 명을 동원하여 요동의 마수산에 진영을 구축했다고 한다. 진영을 갖추는 군사만 6만 명이라는 것은 태종의 친정군이 최소 6만 명 이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친정군의 병력은 결코 4만 명일 수가 없다. 그렇다면 당회요와 신당서에 거론된 육군 10만 명은 요동도행군과 친정군을 합산한 숫자로 볼 수 없으며, 수군 7만 명이 평양도행군의 고유병력인 것처럼 요동도행군의 고유 병력으로 봐야 한다. 신당서에 의하면 태종이 아직 정주에 있을 때 앞서 출발한 요동도행군을 두고 요동을 건너는 10만 명의 군사라는 연급을 한 바 있다.

  이는 요동도행군도 평양도행군처럼 4만 명이 늘어 10만 명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자치통감에는 6만 명 외에도 항호들을 요동도행군에 편제했다고 하여 요동도행군이 6만 명 이상임을 시사하고 있다. 첵부원구, 당회요, 신당서, 자치통감의 기록들은 당회요와 신당서의 육군 10만 명이 요동도행군의 고유 병력임을 뒷받침한다. 요컨대 육군 10만 명, 수군 7만 명은 태종의 친정군을 합산한 숫자가 아닌 각각 요동도행군과 평양도행군의 병력으로 17만 명은 이를 합산한 숫자일 뿐 태종의 친정군은 이들과는 별도로 존재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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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Real 2014/05/24 22:53 #

    엔하위위키에서는 언급하신 주장을 채용했더군요. 정보를 더 알아보다가 보게되었는데 그렇게 되었더군요. 개인적으로 과연 17만만 동원했을까?는 굉장히 의문입니다. 고수전쟁당시에 수나라 스스로도 마지막까지도 30만대군을 동원한바 있다는건 그만큼 고구려군의 수성전 대비나 기동전 대비에서 전투병력이 많이 필요하다는걸 의미한다고 보는데 그 경험을 갖고 있는 당나라가 고작 1차전쟁에서 아무리 정예화를 한다고해도 최소 전투병력만 30만 최대40~50만을 안갖출리는 만무하다고 봅니다. 게다가 공성전과 같은 장애물을 극복하는 공격자에게 가장 불리한 전투를 강요받는 전선을 택하는데 적은수만 이야기한다는것도 납득가기 어려운 문제라고봅니다.(고수전쟁을 경험한 베테랑들이 병력의 우위적 문제로도 어려웠던 사항을 병력의 1/10으로 대응하겠다는 전략을 갖고 싸운다는건 더 어려운 문제고요.)

    정예화의 의미는 1/10으로 줄여서 가는게 아니라 양적전력을 얼마나 질적으로 우위를 점할수 있느냐를 기준으로 삼는 것인걸 감안한다면 고수전쟁때 수나라 총동원 전투병력보다 1/3 최대 1/10까지 줄이고 원정을 감행할것이라고 보여진다면 이건 당군이 거의 못해도 19세기급 수준의 과학기술력을 보유해야 맞지 않나 싶군요.

    이런 대비조차 안하고 병력편성을 한다는건 결국 이세민과 당군 최고지휘부가 전쟁준비를 제대로 안했다는 소리밖에 안된다고 봅니다. 나당전쟁때도 당나라가 동원한 지상군만 20만이 넘었던적을 감안한다면 당나라의 원정전쟁에서 유독 고구려만 대규모 병력을 동원할 이유는 없다라고 평가되는것도 사실 어렵고요.
  • 에레메스 2014/05/25 07:12 #

    사료를 제대로 보지 않고 수박 겉핧기 식으로만 보면 그런 주장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사료 몇 개만 더 봐도 10만 설, 17만 설의 허구는 너무도 쉽게 드러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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