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와 북위의 전쟁 기록에 대한 검토 한국 고대사

484년
영평 2년 위나라 오랑캐가 공격하여 백제왕 변도를 크게 격파했다.<건강실록>

백제국은... 후위 효문제가 무리를 보내 (백제를) 정벌해서 격파했다.<통전>

백제국은... 후위 효문제가 군사를 보내 (백제를) 정벌해서 격파했다.<태평환우기>

봄 2월  왕이 고구려가 제의 책봉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표를 올리고 내속(內屬)하기를 청하니, 이를 허락하여 왕에게 대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 왕(大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百濟王)을 제수하였다. 내법 좌평(內法佐平) 사약사(沙若思)를 제에 보내어 조공하려 하였으나 서해 가운데서 고구려의 바다를 순찰하는 군사를 만나 더 나아가지 못하고 돌아왔다.<백제 본기>

7월 고구려가 북변을 침범하므로 우리 군사는 백제와 협력하여 이를 모산성 아래에서 크게 격파하였다.<신라 본기>

겨울 10월 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그때 위는 우리나라가 강하다고 생각하여, 여러 나라 사신의 숙소를 두는데, 제의 사신을 첫 번째로, 우리 사신을 그 다음으로 두었다. <고구려 본기>

488년
영명 6년 위가 군사를 보내 백제를 공격했으나 백제에게 패하였다.<자치통감>

봄 2월 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여름 4월 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윤 8월 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490년

이 해에 魏虜가 또 騎兵 수십만을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그 境界에 들어 가니 牟大가 장군 沙法名‧贊首流‧解禮昆‧木干那를 파견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虜軍을 기습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무찔렀다.<남제서 백제전>

지난 庚午年(490년)에 獫狁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깊숙히 쳐들어 왔습니다. 臣이 沙法名 등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역습케 하여 밤에 번개처럼 기습 공격하니, 匈梨가 당황하여 마치 바닷물이 들끓듯 붕괴되었습니다. 이 기회를 타서 쫓아가 베니 시체가 들을 붉게 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 예리한 기세가 꺾이어 고래처럼 사납던 것이 그 흉포함을 감추었습니다.<남제서 백제전>

가을 7월 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9월 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7월에 북부 사람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사현과 이산의 두 성을 쌓았다. 9월에 왕이 나라 서쪽의 사비원에서 사냥을 하였다. 연돌을 배하여 달솔을 삼았다. 11월에 얼음이 얼지 않았다.<삼국사기 백제 본기>



사료상 백제와 북위와의 전쟁은 484년, 488년, 490년에 있었으며, 484년 전쟁에서 북위가 백제를 이겼으며, 나머지 488년과 490년 전쟁에서는 백제가 북위를 격파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현재 학계에서는 백제와 북위가 전쟁을 했다는 기록을 인정하지 않는다. 대신에 고구려와 백제와의 싸움을 한 것으로 파악하고 고구려를 북위로 오기했거나 백제가 표문에서 교전국을 험윤이라고 표현한 것에서 비롯된 남제의 오해로 파악하는 경향이 있는데, 인용한 사료에서 보이듯 488년과 489년에는 백제와 고구려의 전쟁 기록이 없다. 484년에는 전쟁 기록이 있긴 있으나,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에게 고구려가 패한 것으로 중국 측 사료와 일치하지 않다. 물론 삼국사기에 누락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최소한의 근거가 될 사료가 전무하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반면 북위와의 전쟁 기록은 거의 남조측 사료이기는 하지만서도 그래도 최소한 5개의 사료에서 전하고 있다. 따라서 북위(험윤, 위로)를 고구려의 오기로 보거나 남제의 오해로 보기 어려우며 근거가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험윤과 흉리는 중화에 상대되는 북쪽 오랑캐에 대한 멸칭이다. 이러한 표현을 중화를 자처하는 남제에게 형식상으로나 번국으로 존재하는 백제가 보내는 표문에서 감히 험윤과 흉리를 '백제의 북방 오랑캐를 의미'하는 뜻에서 썼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설사 쓸 수 있다고 하더라도 험윤을 고구려로 볼 근거는 없다. 특히 남제서에서는 흉리는 흉노를 의미하며 위로(북위)를 두고 흉노종이라고 하였으므로 험윤과 흉리는 고구려로 볼 여지는 없다. 나아가 위로를 위에 붙은 오랑캐(=고구려)로 보는 것 역시 자의적인 해석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남제서의 북위전은 이름부터가 위로전이기 때문이다. 만일 같은 논리를 적용한다면 위로전 역시 위나라에 붙은 오랑캐라고 해야 할 상황에 오게 될 것이다. 또한 일본서기에 의하면 백제는 고구려에 대한 멸칭으로 狛이라는 표현을 썼다는 것이 드러난다. 남제 역시 고구려에 대한 비칭으로 貊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러므로 위로는 북위 그자체로 보는 것이 타당하며 고구려가 개입될 여지는 없다고 하겠다.

혹자는 488년, 489년에 고구려가 북위에 사신을 각 해마다 사신을 3번씩이나 보냈다는 것에 주목하여 백제와 북위의 전쟁에 고구려가 개입했을 것이라는 견해를 보였으나. 고구려가 북위에 한 해에 사신 3번 보낸 해는 488년과 489년 말고도 474년, 476년, 492년, 513년, 518년에도 있었다. 따라서 단순히 한 해의 조공횟수로 굳이 과도하게 의미 부여할 근거는 없다고 생각한다. 애당초 고구려가 북위에 한 해에 3번 조공을 했다는 기록들에 고구려의 어떤 특정한 의도가 담겼다는 것도 정황에 따른 추론일 뿐 다른 경우처럼 단순한 교역량 증가로 볼 여지도 있기 때문에 온전한 근거로도 보기 어렵다.
따라서 484, 488, 489년 전쟁에 고구려가 개입한 흔적이 전혀 없고 간접적인 기록조차 없으므로 고구려 개입설은 그야말로 사상누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통전과 태평환우기 그리고 건강실록의 기록을 주목해보자. 이 세 사료에 기록된 전쟁은 그 내용이 유사한 것으로 보아 같은 해 즉, 484년에 벌어진 전쟁을 기록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 전쟁에서 후위 효문제가 백제를 공격하여 백제를 격파했다고 기록한 것으로 볼 때 분명 백제와 북위의 전쟁은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아무래도 통전과 태평환우기, 건강실록의 백제가 패한 기록까지 백제가 남제에게 허위사실을 유포한 것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484년의 기록을 통해 백제와 북위와의 전쟁이 있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에 488년과 490년의 전쟁도 단순히 고구려의 오기나 허위사실로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러한 북위의 승전 기록이 있음에도 북조 측 사료에 백제와의 전쟁이 전하지 않는 이유는 고의라기 보다는 단순누락이 아닐까 싶다. 삼국사기에 없는 것도 단순 누락으로 보여진다. 주지하다시피 삼국사기가 완전한 사서는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백제와 북위가 전쟁을 벌인 전장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백제와 북위의 전쟁 자체를 부정하고 자의적인 해석을 하는 것은 지양해야 할 것이며, 백제와 북위가 전쟁을 했다는 기록은 인정하고 전장에 대해 논하는 게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북위와 백제와의 전쟁은 어떤 식으로든 벌어졌을 것이며, 가능성은 어차피 북위가 해로로 백제로 쳐들어왔다거나 백제가 상륙전을 벌여 거점을 확보했다거나 둘 중 하나로 50대 50이다.

전자부터 살펴보자면 내륙중심의 행정체제를 가진 북위의 경우 해외원정은 기본적인 해운력 향상문제는 물론 선박건조 비용과 선박운용원 그리고 상륙병에 대한 훈련 그리고 보급로 문제까지 상당한 시간과 재정이 소모되는 사업이다. 물론 북위가 남제를 상대로 한 강상수군을 양성한 바 있으나. 도해와 도하는 분명 다른 문제이다. 전장이 백제 해안지역이라고 가정해보자. 기록상 북위는 백제에 한 번도 아니고 세 번 씩이나 공격한 것으로 보아 백제 공격에는 어떤 뚜렷한 목적이 있던 것이 분명하다. 이 정도의 상당한 시간과 재정을 투입할 정도로 백제를 친 이유는 최소 동성왕 정권의 전복이거나 백제의 멸망을 목적으로 진행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사실 백제를 굳이 멸망시켜야 할 이유가 북위에게 있는지 의문이지만, 어쨌든 북위가 해외원정을 했다면 동원한 병력은 최소 수 만은 됐을 것이며, 484년에 백제를 크게 격파했을 때 북위는 그 여세를 몰아서 동성왕 정권을 전복시키든 어떤 식으로든 간에 그에 따른 후속조치를 했어야 하지만, 단지 크게 이긴 것으로 끝나고, 이후 전개된 488년, 490년 전쟁에서는 패배를 하였다. 결과적으로 484년, 488년, 490년에 따른 해외원정은 막대한 시간과 재정을 낭비한 셈이다. 북위가 백제를 공격하려면 육로든 해로든 고구려의 적극적인 협조가 필요한데, 자국의 정보가 새어나가는 것에 꽤나 민감해하던 고구려가 순순히 협조했을 지도 의문이다.

그러나 전장을 대륙쪽으로 보는 것도 문제가 있다. 크게 요서 지역과 산동 일대로 보는데, 둘 다 명확한 근거는 없다. 오히려 사료의 글자 그대로만 보면 전장은 백제의 경내이며, 공격해 들어온 쪽은 시종일관 북위이다. 물론 사료상 백제는 남제의 용병으로 볼 여지도 있기 때문에 484년 이전에 거점이나 보급 등에서 남제의 적극적인 협조가 이뤄진 것으로 파악한다면 전장을 대륙으로 보는 것도 아주 불가능한 추론은 아니다. 이러한 남제의 지원이 전제가 된다면 북위와 달리 백제는 막대한 재정을 투입할 필요가 없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고구려에게 사신행이 막힐 정도로 서해에서의 활동이 제한적이었고 고구려와 1대1 대결 하기도 힘들었던 백제가 어떻게 대군을 서해를 통해서 대륙에 보냈는지도 의문이다. 만일 대륙쪽에서 전쟁이 있었다면 484년 이전에 백제가 대륙 어딘가에 거점을 확보했단 것이 되는데, 여기에는 거점이 정확히 어디에 위치했는지와 남제로부터 거점을 확보한 과정을 명확히 알려주는 사료가 전혀 없으므로 추론 이상은 불가능한 것이 맹점이라고 할 수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본인이 현재 전장이 어디라고 콕 집어서 의견을 개진할 능력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쓴 이유는 뚜렷한 근거없이 백제와 북위의 전쟁 가능성을 덮어놓고 오기나 오해로 파악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으며 반대사료나 반증이 없는 한 관련 기록들을 신뢰하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되기에 쓴 것이다. 전장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두 견해 모두 가능성이 있는만큼 쉬이 오기나 오해로 파악할 수 없는 노릇이다. 어차피 백제와 북위의 전쟁양상에 대한 문제는 사료가 부족한 만큼 그야말로 소설적이지만서도 누가 더 합리적이고 개연성있는 추론을 하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덧글

  • 황룡 2012/12/01 19:32 #

    좋은 글 잘보고 갑니다.
  • 에레메스 2013/01/06 12:15 #

    감사합니다~^^
  • 零丁洋 2012/12/01 23:31 #

    저도 비슷한 의견입니다. 한사군에 대한 문헌적 자료가 한줌 밖에 안돼도 자명한 사실로 수용하면서 시간적으로 후대라 기록의 신빙성이 높을 가능성이 있는 자료는 일방적으로 무시하는 근거가 뭔지 궁금하네요. 그리고 중국적 관점에서 자기 내지의 사건 보다 아주 먼 외방의 사건이 더 신빙성이 있다는 것이 납득하기 어렵네요. 상식적으로 최영과 이성계의 요동에서 여정이 우리에게 신빙성이 있을까요 아니면 삼남에서 왜구 토벌이 더 정확해 보일까요?
  • 에레메스 2012/12/02 11:05 #

    사실 개인적으로 484년 전쟁이 가장 의문이기도 합니다.^^;
  • 야스페르츠 2012/12/02 11:43 #

    한사군에 대한 문헌적 사료는 한줌은 커녕 이 백제-위 전쟁보다 몇 배는 더 많고 충실하거든요. 다른 역사적 견해는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잘 보시면서도 한군현에 대해서만은 항상 색안경을 끼고 보시는 零丁洋 님의 견해의 근간이 뭔지가 저는 더 궁금하네요.
  • 零丁洋 2012/12/02 17:02 #

    야스페르츠// 다소 근거가 미약해도 여지는 남겨두자는 말이죠. 어차피 천오백년 이상된 사건들이니 확실한 근거라해도 확율적인 근거가 매우 높다는 정도지 모든 주변적 논의를 종식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 번동아제 2012/12/01 23:55 #

    본문에 적으신 바와 같이 해석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되지만, 그 밖의 해석이 전혀 근거가 없다는 말씀도 조금 성급하신 것 아닌가하는 생각도 듭니다. 일단 태평환우기의 경우 간행연대나 사료의 성격을 볼 때 일단 제외하고 놓고 보면 결국 이 문제에 관해 검토할 가치가 있는 사료는 남제서와 건강실록만 남습니다.

    건강실록의 경우 위 전투기록 바로 앞에 백제군 혹은 백제가 고려(고구려)의 동북에 있다고 기록하는 등 사료 자체의 정확성에 상당히 의문이 남죠. 고려의 서북에 있다고 하면 백제의 요서 진출설이라도 떠올리겠지만 동북에 있다고 하면 난감하니까요. 건강실록의 다른 대목에도 요서나 진평이라는 말도 없이 뜬금없이 "自置百濟郡"이란 표현만 나와서 지명을 보다 분명하게 명시하는 다른 사료에 비해 무척이나 어설픕니다. 다시 말해 건강실록이 원사료를 토대로 본문을 서술할 때 상당히 거칠다는 점을 알 수가 있습니다.

    결국 좀 더 신뢰성있는 사료로는 남제서만 남게되는데, 남제서도 남제서 백제전 본문에 위로 운운한 대목을 보면, 위로라는 용어 외에 전체 설명이 백제측 표문의 내용을 부연한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명백하게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에 대한 남제측 사료는 없었고, 그 원출처가 백제측 표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위로 자체에 대한 해석은 2차적인 문제이고, 사료가 생성된 경위를 고려해 보면 중요한 것은 백제가 중국 남제에 "험윤의 공격을 받았는데 격파했다"고 주장했다는 내용이 중요한 것이죠.

    따라서 이 문제를 해명할 때 다른 내용보다는 "험윤"이 뭐냐는 것에만 집중하면 될 것 같습니다.

    1) 이 때 험윤을 당연히 북위라고 생각하는 견해도 물론 가능하겠지만, (충분히 가능성이 있음)

    2) 고구려라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습니다. (이것도 배제 못함)

    험윤이야 어차피 비칭인데, 황제 같은 자존의 칭호도 아니고 특정한 비칭을 중화만 사용할 수 있는 용어라는 해석은 과도한 것 같습니다. 오히려 백제가 의도적으로 국명을 명시하지 않고 모호한 용어를 썼다고 보는 해석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습니다. 고구려를 전통적 비칭인 험윤이라고 묘사함으로써 백제가 상대하는 적국인 고구려가 남조 국가들이 상대하는 적국인 북위와 유사한 성격의 존재임을 은연중에 강조한 대목이라고 해석하는 것이죠.

    사실 남제 조정에서 표문을 받았을 당시에는 백제측이 지칭한 험윤이 무엇인지 확인하려 했다면 명확히 알 수 있었다고 짐작됩니다. 사실 험윤이란 것이 이미 주나라시대부터 사용된 비칭이라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칭하는 것인지 외교문서상으론 모호하니 당연히 백제측 사신에게 물었을 것이고 그에 대한 답변도 나왔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남제서 등 남조계열의 사서에서 백제측 표문의 험윤을 북위를 의미하는 위로로 해석했느냐...이건 결국 남제서 등 남조계열의 사서를 편찬하던 당사자들이 다른 기록없이 백제측 표문만 보존된 상태에서 집필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렇게 볼 경우 건강실록, 자치통감 등에 적힌 북위-백제 관련 전쟁 기록의 단편들도 490년 전투와 그에 대한 백제측 표문이 중국에 전달된 과정과 유사한 과정을 거쳐 잔존한 기록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보입니다.

    반대로 이것을 실제로 1) 북위가 백제를 침공한 기록이라고 생각한다면 다시 1-1)백제 대륙진출설과 연계시켜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1-2) 백제 본토에서 벌어진 사건이라고 이해할 것인가라는 관점에서 나눠야하는데, 1-1)의 경우 고고학적인 증거 문제로 쉽게 결론내리기 힘든 사안으로 보이고 1-2)의 관점에서 보자면 북위가 백제를 공격할만한 이유가 있는가에 대한 매우 복잡한 추론 과정을 거쳐야할 것으로 보입니다.

    하여간 현재로서는 1-1), 1-2), 2)의 해석이 모두 가능성이 있다고 보이며 현재 시점에서 2)의 견해를 가능성이 없다고 완전 배제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 에레메스 2012/12/02 08:17 #

    건강실록의 고려의 동북에 백제가 있다는 기록에 대해 저는 소위 만주백제설을 염두하고 있기에 단순한 오기로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사실 만주백제설은 보완해야 할 점이 한 두 개도 아니고 본문의 문제와는 조금 거리가 있으니 여기서는 논외로 하겠습니다.

    말씀하신 바와 같이 본문에서 저는 분명 2)설이 근거가 없다고 단언을 했는데, 여기서 말한 근거란 추정의 근거가 아닌 최소한의 사료적 근거를 말한 것입니다. 애초에 험윤=고구려 설이 대두된 것도 어떤 사료적 근거로부터 생성된 것이 아니라 북위와 백제의 교전 기록은 각국이 처한 정황상 믿을 수 없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추정에 추정을 거듭하면서 만들어진 설입니다. 이 때문에 험윤=고구려 설의 가장 큰 맹점인 해당 전쟁년도에 고구려와 백제의 전쟁 기록이 부재하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사상누각이라는 표현도 쓴 것입니다.

    분명 정황상 백제와 북위가 교전하기 어렵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그렇다고 (번동아제님께서도 인지하고 계시다시피) 아주 불가능한 것도 아니기에 정황 때문에 믿기 어렵다는 이유로 아예 사료에 없는 전쟁을 만들어내는 작업 또한 성급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 저로서는 의견을 보여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로 트랙백이든 댓글이든 개의치 않으니 너무 죄송해하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 번동아제 2012/12/02 17:41 #

    기본적으로 사료 자체가 애매한 점이 있기에 의견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는 분야라고 생각됩니다. 제 의견을 한 번 더 보충설명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사실 정황론이나 개연성 차원에서 접근했다면 제가 위와 같이 설명하지 않았을 겁니다. 제가 쓴 글은 그 같은 정황 논리를 떠나 북위-백제 전투를 전하는 사료 자체도 내재적으로 모호한 성격이 많다는 점을 지적한 겁니다. 외부 판단을 떠나 그 사료 자체만 분석해 봐도 무언가 그대로 믿기에는 모호하다는 것이죠.

    애당초 북위측 사료에 관련 기록이 전무할 뿐만 아니라 백제본기에도 이 문제와 관련해 백제측 고유 사료를 남긴 것이라고 인정할만한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양 당사자의 기록에 모두 원천 기록이 전해오지 않는다는 뜻이죠.

    결국 이에 대한 모든 기록은 기본적으로 남조계 사서로 소급되는데, 여러 남조계 사서도 북위의 장수 명칭 등에 대한 구체적 기록이나 지명이 누락되어 대단히 모호한 것이 특징입니다. 비교적 설명이 자세한 남제서 백제전의 전투경과에 대한 설명조차도 그 내용을 보면 남조측이 이 전투에 관한 별도의 사료를 가지고 있어서 기록했다기보다는 백제적 상표문을 토대로 부연설명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는 점이 문제의 출발점이죠.

    결국 실질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 검토할만한 가치가 매우 큰 사료는 남제서에 실려있는 백제측 상표문으로 모두 귀결되는데, 그 사료조차도 북위(위), 위로, 고구려, 고려, 맥 등 구체적인 국가 혹은 종족명칭이 등장하지 않고 "험윤"이라는 시대초월적인 비칭이 나온다는게 결정적 문제입니다. 애당초 백제측 상표문에 보다 분명한 북위(위), 위로라는 표현이 나왔으면 이런 식으로 복잡하게 논할 필요조차 없다고 생각됩니다.

    삼국사기에 주요 전투 기록이 누락되거나 연도 표시에 출입이 있는 것은 한 두건이 아니니 삼국사기 해당연도에 비슷한 전투가 기록되어 있는지 여부는 본질적인 문제는 아닐 것 같습니다. 건강실록에 대해 제가 언급한 것은 대륙백제설 자체를 부인한다는 관점에서라기보다는 그와 연관된 것으로 유추할 수 있는 기록이 수록된 다른 남조계 사서에 비해서도 생략이 심하고 문구도 거칠어서 사료를 터치하는 방법이 그렇게 세련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한 겁니다.
  • 에레메스 2012/12/03 15:39 #

    고견 잘 들었습니다. 저도 몇 줄 끄적이면서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개인적으로 영 안 좋은 일이 있기에 더 이상 토론을 지속할 상태도 아니고...^^;)

    아무래도 험윤이라는 표현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490년 전쟁에서 백제가 교전국을 험윤(또는 흉리)이라고 적은 것을 남제가 위로로 파악한 것은 그만큼 타당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험윤(흉리)이라는 비칭이 모호하다고는 하지만, 이러한 현상이 비단 백제의 표문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비슷한 예라도 볼 수 없지만, 수당도 고구려를 공격할 때 고려, 요동이 아닌 문죄백랑 등 다소 모호한 표현을 쓴 바 있습니다. 아무튼 남제서 편찬진들은 분명 표문상의 험윤(흉리)이 북위라고 인지했기 때문에 북위라고 적었을 것이며 건강실록과 자치통감에서도 교전국을 분명히 북위라고 명시한 상황에서 저로서는 이게 그렇게까지 문제가 되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유원재 선생께는 송구하나, 개인적으로 유원재 선생의 험윤=고구려 설은 험윤이라는 표현에 확실한 근거를 갖추지 않은 채 지나친 의구심을 갖고 거기에 추정에 추정을 더 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제 망상일 수도 있겠지만, 이 지나친 의구심의 배경에는 백제-북위의 전쟁은 정황상 믿기 힘들다는 고정관념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 적 있습니다.

    설사 남제서의 험윤=북위가 편찬자들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곧 건강실록과 자치통감의 정확성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490년 전쟁을 적은 백제의 표문과 달리 484년, 490년 전쟁의 표문에서 위 혹은 위로라고 적었기 때문에 건강실록과 자치통감에서 교전국을 분명하게 북위로 기록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나아가 484년 전쟁을 기록한 건강ㅅ길록의 기록도 가벼이 넘길 수 없는 것이 널리 알려진 남제서나 자치통감 기록과는 전쟁의 연도도 다르며 북위가 백제를 대파했다는 내용이 담겨있기 때문에 더 더욱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삼국사기가 누락이 적잖은 온전치 않은 사서라는 것은 본문에서 저도 거론했다시피 충분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삼국사기 기록의 부재를 거론한 이유는 적어도 현시점에서 험윤=고구려 설은 최소한의 사료적 근거가 없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는 의미에서 적은 것입니다.

    끝으로 모본왕의 화북공격은 맥이라는 표현이 시대마다 범위가 다른 데서 나온 오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 견해의 결론은 고구려의 화북공격 기록은 오환, 선비가 화북공격한 것을 오해한 것이라고 하는데 입증과정에서 적절한 교차검증 및 사료비판이 있었습니다. 험윤=고구려 설도 이 정도 과정은 거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무쪼록 말씀 잘 들었습니다.^^
  • 번동아제 2012/12/01 23:49 #

    트랙백으로 달아야할 것으로 쓰다가 보니 장황한 댓글을 달아 죄송합니다.
  • 솔까역사 2012/12/02 02:07 #

    당시의 정황에서 파악해 보면 어떨까요?
    http://qindex.info/drctry.php?id=Silla&ctgry=2491
    백제는 475년 고려에게 한강유역을 빼앗기고 웅진으로 천도했고 개로왕,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 등이 차례로 살해당했습니다.
    또 개로왕의 표문을 보면 백제와 북위는 사신을 교환하기도 힘들 정도의 항해 수준이었습니다.
    이즈음은 영산강 유역에 전방후원분이 나타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일본서기에는 왜국이 백제의 왕위 계승에 간섭했다고 나옵니다.
  • 에레메스 2012/12/02 11:04 #

    솔까역사님께서 생각하시는 백제의 정황에 비추어 본 백제와 북위의 전쟁에 대해 어떤 고견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 솔까역사 2012/12/02 12:09 #

    동성왕은 495년 표문에서 고려를 가리켜 험윤이라고 했는데 537년 남제서 편찬자가 이것을 북위로 오인해서 기록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왜 490년 기록에 백제와 고려 사이의 전쟁이 없느냐는 의문이 생기는데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기록이 누락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둘째, 기록은 있었으나 1145년 삼국사기 편찬자가 남제서의 기록과 비교해 보고는 모순된다고 판단하여 버렸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셋째, 동성왕이 과장한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표문이라는 것이 외교문서라 왜곡된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왜국이 남조에 보낸 표문을 생각하면 이해가 될 듯합니다.
    어쨋든, 이런 가능성들은 모두 백제와 북위가 전쟁을 했을 가능성보다는 훨씬 높다고 생각됩니다.
  • 에레메스 2012/12/02 12:21 #

    송구하나, 언급하신 세 가지 모두 다 사료적 근거는 한 개도 제시하지 않으셨으며, 정황상 믿을 수 없다는 인식에서 나온 추정일 뿐이기에 그 이상의 논리전개는 어렵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특히 두번째는 삼국사기 서술의 특성상 더 더욱 취신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뚜렷한 근거도 없이 언급하신 세 가지 가능성이 백제-북위 전쟁보다 가능성이 높다고 하시는 것은 다소 비약이 심하다고 보여지며 사상누각이라고 생각합니다.
  • 솔까역사 2012/12/02 13:10 #

    기록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죠.
    사료비판을 왜 하겠습니까?
    더 상대할 사람이 아닌듯하군요.
  • 에레메스 2012/12/02 13:37 #

    제가 별로 따르지 않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 임나일본부설, 동북공정, 북옥저동부여설 등 이러한 설들도 최소한 사료 한 줄 이상의 근거를 갖고 있습니다. 사료비판도 모순이 되는 반증이 될 만한 기록이나 교차검증 여부가 있을 때 가능한 것이지, 무턱대고 정황상 추정 근거에 의지하여 믿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사료비판이라고 부르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르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정황도 전장이 어디이든지 간에 전개가 다소 복잡하게 전개될 뿐 반드시 백제와 북위가 전쟁을 하지 못할 여건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마에스트로 2012/12/03 10:23 #

    솔까역사/

    기록을 믿지 않으면 도대체 뭘 믿는단 말이오? 사료 비판도 정도껏이오. 또한 어설픈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소리는 하지 마시오. 기록이라 함은 적어도 그루터기 사실이오. 약간 과장이 있다 하더라도 아주 없는 사실을 쓰지는 않는단 말이오. 또한 과장에도 어느 정도 원인이 존재하오. 기록조차도 신뢰하지 않으면 도대체 뭘 신뢰하란 말이오? 그러는 귀댁은 일본서기에 대한 사료비판도 무시한 채 맹종하고 있지 않소? 헛소리를 하더라도 좀 자격을 갖추고 하시오. 솔까역사 당신은 도무지 자격이 없소. 지난번 일본서기 구절 해석 잘못해서 망신당해 놓고서는 얼마나 더 망신 당하려고 그러시오?

    자신의 테제에 맞지 않으면 상대하지 않는다라? 무조건 말장난이라 여기고 차단? 세상과 담을 쌓으시구려. 그냥. 그런 귀하의 태도야말로 정말로 비역사적인 태도란 것을 알아두시오. 또한 학계에 귀하의 테제를 바탕으로 쓴 논문을 제출해보시구려. 두말 없이 찢어 발겨질거요.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고 고집쟁이로 살아가는 인생은 고립을 추구하게 되며 그런 학설은 고인 웅덩이 물이오.

    어차피 당신 귀에는 들리지 않겠지만 나도 할 말은 해야겠소. 솔직히 얘기하면 당신은 상대할 가치도 없는 비논리적인 사람이지만 할 말은 할 것이오.

    모든 학설에는 적어도 최소한의 그루터기 사실은 가지고 있소. 고대 기록이 비록 저자의 관점이 들어갔다고는 하나 적어도 없는 사실은 지어내지 않소. 승패가 모호할 때 몇몇 전과를 바탕으로 승리로 기록하는 정신승리는 있어도 적어도 진 전쟁을 이겼다고 하지 않는단 말이오. 그런 면에서 험윤과 백제의 전쟁을 동성왕의 과장이라고 기록하는 것은 잘못되었소. 양자의 전쟁 기록 역시 불신하는 태도 역시 비역사적인 태도란 말이오.

    게다가 그러는 당신은 임나일본부는 잘도 믿지 않소? 물론 왜의 한반도의 남부에 대한 영향력은 나도 부정하지 않소. 본인은 왜 계의 소국들이 한 계의 소국들과 6세기 중엽까지 경합을 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소. 그러나 그것이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해주지 않소. 또한 귀하가 그렇게 떠받드는 <일본서기>도 7세기 기록이오. 엄연히 후대의 시선이 있단 말이오. 당시에는 일본이란 엄연한 국가체가 존재하는 바, 그 때 시선으로 과거를 이해하려고 하니까 문제가 되는 거요. 그 시각을 오늘날 일본이 그대로 가져다가 쓰고 있고. 7세기와 4세기의 격차가 무려 300년이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300년은 말해 무엇하겠소? 7세기의 저자도 편집과정에서 이에 대해 오해를 했을 것은 분명하오. 후대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일테고.

    역사를 하려거든 좀 논리적으로 하시오.
  • 다문제일 2013/08/31 22:07 #

    마에스트로// 무슨 포스트 모더니즘까지 갈 것도 없고 기껏 피똥 싸 가면서 5세기 이후의 백제를 야마토甲의 마리오네트로 만들어 놨더니 중국 시시한 지방 정권도 아니고 화북을 호령하던 북조와 전쟁을 벌이고 이기기까지 했다니 멘붕 일으키는 거 아닌가요. 그나저나 진구황후 삼한 정벌 신화를 신성하게 믿어 섬기는 솔까역사 입에서 사료 비판이라는 용어가 나올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려.
  • 게으른 바다표범 2018/03/11 03:03 #

    북위와 백제 전쟁의 장소에 대해 백제가 알려주지 않는다면, 북위에게 물어야 합니다.
    북위는 백제의 위치가 어디라고 알고 있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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