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remeth's 虛勢sism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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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로그 마이가든



개정된 한국사 교과서의 5세기 고구려와 북동부여 상황 ㄴ토론


위 지도는 3세기에 북옥저 지역에 동부여가 건국된 것으로 추론하고 494년에 북부여가 멸망한 것으로 추론 것인데, 알만한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상기한 지도의 (북)부여와 동부여의 멸망시기와 위치에 대해 전혀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한 저의 생각은 북부여, 동부여 글에서 완전 간단히 정리한 바 있으며, 감사하게도 마에스트로님께서 제가 이전의 쓴 글들을 바탕으로 지도와 함께 일목요연하게 연재를 해주셨습니다. 
에레메스 님의 설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부여사 (1)
에레메스 님의 설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부여사 (2)
에레메스 님의 설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부여사 -完-

북옥저동부여설에 대해서는 보다 집중적으로 이전의 쓴 글들을 수정보완하여 소고 형식으로 <북옥저동부여설 비판적 검토>를 쓰고 이후 여휘님과 다물전사님과 토론을 한 적이 있는데, 관심있으신 분들은 참조바랍니다.

다물전사님과의 토론
여휘님과의 토론1
여휘님과의 토론2

동북부여의 건국과 북,동부여의 멸망시기에 대해서도 이전에 썼던 글들을 바탕으로 하여 <북옥저동부여설 비판적검토>처럼 소고형식으로 수정보완하려고 하는데, 3달 째 노터치 중이네요.;;

P.S. 1- 그나저나 식신=동예설은 그야말로 비주류설인데, 어떻게 채택됐는지...ㅋㅋㅋ;;
P.S. 2-  아래 지도는 제가 생각하는 광개토~장수태왕 영토입니다.(물론 지도 그린 이는 저와 생각이 다르겠지만..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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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야간개장 다녀왔습니다!ㅋㅋ 일상잡담

어제 저녁 약속 때문에 광화문 갔었습니다.ㅋㅋ 
직행버스가 생겨도 수원이 아직 깡촌(?)이라 그런지 1시간 넘게 걸리더군요.ㅠㅠ 
약속시간 보다 1, 2시간 일찍 나와서 교보문고 좀 들렸다가 저녁먹고 후식 먹고 그냥 걷고 있었습니다.ㅋㅋ 
파이널로 맥주나 한 잔 하고 집에 가려고 했는데, 광화문 앞 횡단보도 걷고 있을 때 즈음 
사람들이 삐까번쩍하는 광화문을 막 사진찍고 있더군요.ㅋㅋ
 
↓ 요게 그 횡단보도 앞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하도 사람들이 북적대길래 근처의 사진찍는 사람에게 오늘 뭐하냐고 물으니까 경복궁 야간개장이라고 그럽디다.ㅋㅋㅋ
맥주생각은 살며시 즈려밟고 당장에 일행에게 루트를 바꾸자고 했습니다.ㅋㅋ
 일행도 사학과 생이라 그러니 흔쾌히 응하더군요.ㅋㅋㅋ

표가 어른은 1인당 3천 원이라서 5천원과 천원짜리 지폐를 꺼낼 때 허세 떨었습니다.

<하...이황과 이이는 치열하게 이기론을 펼쳤지.
세간에서는 그런 그들의 논의를 쓸데 없다고 비웃을 지 몰라.
하지만, 그거 알아?
비록 서로의 접근하는 방식이 달랐을지언정
그들이야말로 누구보다 우주의 원리를 이해한 사람들이란 것을...>

사실 저 이기론 전혀 모릅니다.ㅋㅋㅋㅋ
경복궁 이름 때문에 필연적으로 걸으면서 정도전 얘기도 좀 했는데 의미없는 가정도 좀 해봤습니다.ㅋㅋ
고려의 요동정벌이 좀 무리가 있긴 했어도 정도전이 계획한 요동정벌이라면 혹 가능하지 않았을까라는ㅋㅋ
"계획한 인물이 정도전이고 천재라 불리는 정도전이고 철두철미했던 정도전인데ㅋㅋ"
라는 말들로ㅋㅋㅋ
무튼 전 태종보다 정도전이 좋고 정도전보다 세종이 더 좋습니다.ㅋㅋ
제가 생각하는 베스트컷인데 근정전의 멋에 아주 그냥 입을 못다물겠더군요.
아래는 근정전 내부인데, 사람 정말 많았습니다.
사진을 좀 더 찍고 싶었지만, 갤투 용량이 꽉 차는 바람에ㅠㅠㅠㅠ
사실 저도 낮에만 가봤지 야간은 처음 가보는데 정말 멋지고 아름답습니다!ㅋㅋ
같이 간 애도 보는 내내 와와 하면서 계속 감탄했습니다.ㅋㅋ 
내일이 야간개장 마지막이라니까
갈 여건 되시는 분들은 가족, 친지, 애인 아니 혼자라도 꼭 가보세요!
후회 안 하십니다!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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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과 단군

요새 역밸에 관련 글들이 올라오고 있길래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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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의 이상과 현실? 한국 고대사

광개토왕은 오히려 현실적인 인물이었을 것이다.
우선 좋은 글 잘 봤습니다. 추론과정이 다소 다르기는 하지만, 저 역시 광개토태왕이 현실적인 군주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광개토태왕은 말씀하셨듯이 광기에 서린 전쟁광이 아니며 어느 시점에 정복활동을 마치고 내치에 주력했습니다. 저는 광개토태왕이 이 같이 하게 된 데에 있어 현실과 이상에 큰 괴리를 느끼고 현실을 인정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혹 보셨을지 모르겠으나, 김용만 선생님의 저서에서 광개토태왕은 롤모델을 소국에서 제국으로 탈바꿈한 후연으로 삼았다고 추론하였습니다. 여담으로 시노하라 히로카타 선생님의 논문에서도 고구려의 조공관은 전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았습니다. 사실 이전까지 저도 여타 학자들이나 고구려사에 관심있는 분들처럼 고구려는 중원에 관심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두 선학 분들의 견해를 보고 고구려가 모용연을 롤모델로 삼았다면 고구려도 모용연처럼 중원으로 진출할 생각이 있지 않았을까? 고구려라고 중원진출을 전혀 생각치 않았을까? 그렇다면 후방에서 자꾸 껄덕대는 백제, 신라, 가야제국도 정리하고 싶지 않았을까? 하는 다소 앞서나간(?)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생각이 들던 차에 출처도 불분명하고 도쿄대에 소장 돼 있다는 어떤 검증이 되지 않은 중국 측 사료를 접하게 됐습니다.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 사료에 의하면 당시 고구려에 있던 동진의 승려 담시가 말하길 담덕은 포악한 놈으로 자기 아들들을 영주로 봉하고 삼한과 요동을 정복한 뒤 연과 교류하는 척하면서 함대를 만들어서 광고를 짓밟고 황제가 되려 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아, 여기서 오해가 있을까 하여 미리 말씀드리는데, 지금 이 출처불분명한 사료를 인정하자고 주장하려는 의도는 물로 근거자료로써 활용할 의도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저 사료에서 왜 안이 아닌 담덕이라고 표현했는지도 의문이고 여러 의문들이 있긴 합니다. 다만, 묘하게 제가 하고 있던 생각과 맞아 떨어졌기에 소개하는 차원에서 언급한 것 뿐이니 오해없으시길...^^

지금부터 광개토태왕은 삼한정복과 중원진출을 꿈꿔보지는 않았을까 하는 전제로 하고 글을 쓰겠습니다. 다소 무리한 추론이 있더라도 양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우선 광개토태왕은 백제 같은 경우 396년에 아화왕의 항복을 받기는 했으나, 완전히 정복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백제는 기본적인 저력이 있는 국가로 이러한 백제를 내지화를 시키려면 상당한 주둔군을 남겨야 하는데, 서방의 후연이 아직은 건재한 탓에 대규모 주둔군을 남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해도 어느 정도 백제의 기를 꺽어놓은 상태였고, 이후 백제는 광개토태왕의 재위기간 내내 직접 고구려와 전쟁을 벌이지 못합니다. 신라 같은 경우 당시 외교적으로 고구려에게 숙인 상태였는데, 399년 백제의 계획 아래 가야, 왜 연합군이 신라를 공격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광개토태왕은 서방의 후연을 염두해서 후연에 사신을 보낸 뒤 400년에 5만 이라는 대군을 신라를 구원한다는 명분으로 신라에 파병합니다. 신라에 파병된 고구려군은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남해안 일대를 휩씁니다. 당시 광개토태왕은 백제의 개입사실을 인지한 것으로 보아 남해안 원정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백제를 다시 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광개토태왕은 이 원정을 계기로 한반도 남부 전반에 걸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계획이 있었을 것이며, 후연은 그 다음이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 봐서는 광개토태왕에게 상황이 따라준 듯 싶으나, 한 가지 생각치도 못한 변수가 일어납니다.

신라에 대군을 파병하기에 앞서 광개토태왕은 후방을 염두하여 후연에게 사신까지 보냈는데, 후연이 이를 무시하고 고구려의 대군이 한반도 남부에 있는 틈을 타서 고구려의 남소성과 신성을 기습공격해서 자국의 지경으로 삼은 것입니다. 직접적인 근거는 없지만, 이후 이런 상황이 되풀이 되는 것으로 이도학 교수의 견해처럼 당시 백제와 후연이 동맹을 맺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광개토태왕은 후연의 기습공격으로 인해 한반도 남부에 영향력을 행사할 시간도 없이 재빨리 철수하게 되어 원하던 바를 다 못 이루고 결국 남해안 원정은 신라에 한해서만 영향력을 강하게 행사할 수 있는 계기가 된 반쪽 뿐인 성공으로 마무리 됩니다.

후연의 기습으로 인해 원하던 목적을 이루지 못했던 광개토태왕은 한반도 남부에서 후연으로 고개를 돌립니다. 이때부터 광개토태왕은 아마도 원하는 바를 이루려면 한반도 남부보다 후연부터 끝장내야겠다고 생각을 바꾸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김용만 선생님은 400년 3월~401년 사이에 있던 후연의 내분과 402년에 고구려가 요서의 숙군성을 공격한 것을 근거로 하여 400년 3월~401년 사이에 남소성과 신성일대를 탈환했다고 추정했습니다. 이렇듯 주타깃을 후연으로 바꾼 광개토태왕은 후연이 북위와 전쟁을 하는 틈에 대대적인 반격을 하여 후연의 숙군성을 중심으로 한 평주일대를 함락시킵니다. 광개토태왕의 후연에 대한 공세는 계속되어 2년 후인 404년 말에도 요서로 교치 된 연군을 공격합니다.

그러나 403년 백제의 사주를 받은 왜가 404년에 고구려가 후연에 집중한 틈을 타서 대방지역을 공격합니다. 대방지역은 광개토태왕이 새로운 수도의 후보로 둔 평양이 근접한 지역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인데, 이러한 지역을 왜가 침공한 것입니다. 광개토태왕 입장으로서는 후연전선에 있던 군대를 다시 평양지역으로 돌리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400년에 후연이 고구려의 후방을 공격함으로써 후연이 백제세력을 도와준 상황이었는데, 이번에는 후연이 위험해지자, 백제 세력이 후연을 도와준 상황이 연출된 것으로 상황이 매우 절묘하기 그지없습니다. 이는 전술했듯이 백제와 후연이 동맹을 맺었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광개토태왕은 404년에 대방지역을 침공한 왜군을 패퇴시켜 무수한 숫자의 왜군을 참살하지만, 쉴 새도 없이 이번에는 405년, 406년에 후연이 반격합니다.

이때 고구려가 후연으로부터 침공받은 곳이 요동인 것을 감한할 때 402년에 함락했던 평주일대는 고구려가 404년에 자진철수하면서 후연이 탈환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이후 기록에서 숙군성은 후연의 영토를 물려받은 북연이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결과적으로 광개토태왕은 후연의 반격도 격퇴하지만, 그의 분노는 상상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광개토태왕은 407년에 5만 대군을 동원하여 후연(천관우, 이인철, 김용만, 문선종, 정명광, 강재광, 윤병모, 공석구, 임기환)을 공격하고 6, 7개의 성을 함락시키지만, 후연을 직접 멸망시키기지도 못합니다. 왜냐하면 후연이 내분으로 먼저 자멸했기 때문입니다. 여세를 몰아서 더 공격할 수도 있었겠지만, 후연 대신 등장한 북연이 고구려계인 고운을 천왕으로 삼고 408년에 고구려가 북연을 제후국(서영수, 김용만, 시노하라 히로카타, 정명광)으로 규정하면서 화친을 하고 광개토태왕은 서진정책을 마무리합니다. 전술했듯이 모용연이 자국을 괴롭히면서 제국으로 성장하고 몰락하는 과정을 보면서 자란 광개토태왕의 최종목적은 모용연처럼 중원에 진출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과정에서 당시의 삼한인 백제, 신라, 가야제국을 정복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광개토태왕은 이러한 목적을 이루는 데 실패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광개토태왕은 자국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준 모용연으로부터 직접 멸망을 이끌어내지 못 했고 백제처럼 항복을 받지도 못 한 것으로 그의 입장에서 볼 때 제대로 복수를 하지 못한 셈입니다. 복수의 결과로써 후연보다야 낫긴 하지만, 백제 역시 건재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나마 후연 대신 등장한 고운 정권의연을 비록 명분상으로나마 제후국으로 삼으면서 자존심을 세울 수 있었지만, 이 고운마저도 409년에 시해당합니다. 광개토태왕은 당연히 풍발 등에게 책임을 물으려 했겠지만, 하필 또 410년에 동부여가 반란을 일으키고 풍발이 이 틈을 타서 고구려에 망명해 있던 동생 풍비를 아예 고구려에 인질격으로 체류시키면서 이를 무마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결국 광개토태왕은 상황이 여의치 않자, 풍발의 정권을 인정했을 것입니다. 동부여를 치는 틈을 타서 풍발이 고구려를 공격한다면 곤란하니까요.

광개토태왕은 분명 사후에 광개토경이라는 시호를 받은만큼 영토를 크게 넓히고, 고구려가 제국의 길로 들어서는 기틀을 마련한 인물임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광개토태왕 개인의 이상으로 볼 때 백제와 후연의 동맹 때문에 후연이든 백제 쪽이든 어느 것 하나 확실히 하지 못 하고 삼한정복이든 중원진출이든 모두 실패였던 것입니다. 광개토태왕은 동부여 반란 진압 후 정복활동을 일체 하지 않으면서 내치에 주력하다가 413년에 세상을 떠납니다. 이는 광개토태왕이 이중전선의 한계를 절감하고 자신의 이상에 따라주지 않는 현실을 결국에는 인정하면서 사실상 삼한정복과 중원진출을 포기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광개토태왕은 이 같은 현실을 인정하기까지의 과정에서 수많은 고민과 회의가 들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모든 인간이 그렇듯이 광개토태왕이라고 처음부터 현실적이거나 이상이 없던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에필로그(?)로 광개토태왕의 아들인 장수태왕이 중원진출과 삼한정복에 대해서 정확히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 기록이 없어서 모르겠습니다. 광개토태왕이 현실과 이상에서 괴리감을 느끼며 포기한 것을 보고 장수태왕 역시 흔히들 생각하듯이 중원진출에 관심을 두지 않고 아버지가 넓힌 고구려의 세력권을 보존하고 침해당하지 않는 선의 서방정책을 펼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삼한정복을 달성한 후에 중원에 진출하고자 하는 계획을 갖고 북위와 평화를 유지하면서 대북위 포위전선을 펼쳤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가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단언키 어렵지 않나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전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지만, 전자가 됐든 후자가 됐든 간에 삼한정복에 대해서는 사료 곳곳에서 드러나듯이 포기하지 않았던 듯합니다. 그러나 장수태왕 역시 삼한정복에 실패하고 맙니다. 그는 평화를 가장한 채 신라를 필두로 한 삼한정복을 계획했었지만, 백제를 중심으로 한 백제, 신라, 가야제국, 왜가 뭉친 동맹세력의 위력을 절감하고 그의 사후 삼한정복 사업은 사실상 현상유지 상태가 됩니다. 물론 요서방면의 진출은 꾸준히 조금씩 실현해서 6, 7세기에는 영주 이동까지 확보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자국 안보 수준으로 애초에 광개토태왕이 가졌던 중원진출과는 커다란 괴리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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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변경- 삼국사기의 틀안에서 벗어나기(?) ㄴ토론

새로운 용어 제시
요새 주중에 일하느라고 답변이 많이 늦었음을 양해 바랍니다. 이 글은 기본적으로 여휘님에게 드리는 답변이겠지만, 어쩌면 이 토론에 관심을 보여주신 블레이드님과 야스페르츠님께도 조금은 답변이 됐음 하는 바람입니다.

우선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저는 삼국사기가 가진 인식의 틀 안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삼국사기가 한국 고대사를 공부할 때 그 내용면에 있어 엄청난 가치를 지닌 사료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현대 학계에서 쓰일 전문적인 용어에서까지 삼국사기의 인식을 따라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학계는 분명 지나치게 삼국사기의 인식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감이 적잖이 있습니다. 물론 이를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움직임도 있고 개중에는 커다란 성과가 있는 것도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6, 70년대까지만 해도 일제강점기 때 처음 사용된 통일신라시대라는 용어가 보편적이었던 반면 남북국시대는 거의 시장된 단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나 1970년 이우성 교수가 삼국사기와 발해문제라는 논문으로 삼국사기의 체계를 비판하면서 남북국시대론을 주장하고 이를 정식으로 인정받아 지금은 남북국시대라는 용어를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 당시 북한 바로보기 운동도 이우성 교수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고도 합니다. 어쩌면 시대적 요구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블레이드님께서 말씀하신 김태식 교수의 사국시대론을 들 수 있겠습니다. 사국시대론은 현재 쓰이고 있는 삼국시대라는 용어는 신라인의 관념에서 비롯된 용어로 이러한 인식을 삼국사기가 그대로 계승하면서 시간이 흐를 수록 고착화 되고 이를 현대에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점을 비판한 후 가야제국의 입장도 고려하여 만든 용어입니다. 저 역시 삼국시대라는 용어를 별로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사람으로 김태식 교수의 삼국시대라는 용어가 타당치 않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동북부여나 고구려의 입장을 볼 때 그의 사국시대 역시 큰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만, 삼국사기의 인식에서 벗어나 이를 비판하고 새로운 용어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현재 소수이기는 하지만, 사국시대라는 김태식 교수의 용어가 쓰이고 있기도 합니다. 물론 남북국 시대라는 용어의 성공에는 비할 바 못 되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아직 아무도 모릅니다. 

마지막 예로 삼국사기의 동명성왕=추모왕(주몽) 인식도 다산 이래 꾸준히 비판받아 현재 학계 논문에서 고구려의 시조를 일컬을 때 동명왕, 동명성왕이 사라지다시피 하고 대신 주몽, 주몽왕, 추모, 추모왕이라는 용어가 쓰이고 있는 추세에 있습니다. 물론 아직 국사 교과서에서는 동명성왕이라고 표기하긴 합니다만.^^; 삼국사기 문제는 아니지만, 임진왜란 같은 경우도 임진전쟁이나 조일전쟁으로 쓰여야 한다는 주장이 조금씩 힘을 얻고 있지요. 

보편적으로 오래쓰였다고 하여 그것이 곧 타당성으로 직결됨이 아니라는 것은 다들 잘 아실 것입니다. 조경철 교수의 고려, 고구려 국호문제제기도 삼국사기의 틀을 벗어나자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타당성으로 보자면 고구려에서 국호를 고려로 바꾼 역사적 사실을 둘째치더라도 고구려 보다 고려로 불린 횟수나 기간을 봤을 때 고려로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함은 분명합니다. 삼국사기 등장이전까지는 범동북아적으로 보편성까지 갖추었었지요. 단순히 고구려가 고려보다 상대적으로 안 좋은 용어라기 보다는 김부식 이하 삼국사기 편찬진들의 임의로 사료에 기록된 국호를 바꾸면서 보편성을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고려와 고구려를 구분짓고 궁예왕의 국호를 고려라고 했음을 은폐한 의도가 다분히 정치적으로 보여지기 때문에 삼국사기식 구분법은 타당성이 부족다고 본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아무런 반성도 없이 성급하게 무비판적으로 삼국사기식 구분법을 수용한 현 상황에 대해 지적한 것입니다.  뭐, 굳이 표현하자면 삼국사기식 구분법은 안 좋다? 정도가 되겠습니다.ㅋㅋ;;;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삼국사기 등장 이전과는 달리 삼국사기 이후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는 고구려 대신 당장에 바꿔야할 당위성의 근거나 특급사료 발견 같은 커다란 계기가 없다는 여휘님의 지적은 유효합니다. 고려, 고구려 국호문제는 이제 막 문제제기 수준입니다. 조경철 교수는 삼국사기의 인식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에 대한 성찰을 넘어 용어를 바꿔야 한다는 입장에 있고, 아시다시피 저 역시 조경철 교수의 역사는 1차적으로 역사적 사실과 역사 주체를 존중해주는 것이 원칙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입니다. 고구려에서 고려로 용어를 변경해야 한다고 주장한 조경철 교수는 물론 그리고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에 동의할 학자들과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제가 공부를 계속하여 부족하기 짝이 없는 당위성의 근거를 조금씩 채워나가야겠지요. 말씀하신 것처럼 주석을 달면서 인식의 변화를 유도하게끔 하는 것도 하나의 좋은 방법이 될 수도 있습니다. 본문에서 거론한 용어변경의 사례도 있고 움직임도 있고 하니,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렵니다.ㅋㅋ 

제가 당장 바꿔야 하는 당위성의 근거를 들고 온 것도 아니니 이번 토론은 여기서 접을까 합니다. 괜히 읽으시는 분들 번거롭게 전에 썼던 내용 또 쓰면서 동어반복한 감이 없잖아 있는데, 필력이 부족하다보니 그런가보다 하고 이해해주심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비록 서로간의 입장차이가 있긴 하지만서도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으나 저로서는 굉장히 바람직한 토론이었고, 언젠가 다시 논해봐도 나쁘지 않은 주제인 듯합니다. 좋은 주말들 되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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